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누카이 쓰요시 (문단 편집) === 만주사변과 암살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y_15_Incident.jpg|width=1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이누카이데스마스크.jpg|width=50%]]}}}|| || 이누카이의 사망을 알리는 신문 기사 || 이누카이의 [[데스마스크]] || [[만주사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누카이 내각은 당시 [[국제연맹]] 주도의 리튼 조사단에서 내놓은 합의안, 즉 만주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되 일본에 의해 조종되는 지방정부를 성립시키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권익을 보장하는 방안으로 출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폭주하던 군부는 정우회 내의 실력자인 모리 쓰토무[* 모리 가쿠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와 결탁하여 당내 분열을 조장하면서 정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결과는 [[5.15 사건]]이었으니, 우유부단한 총리에게 정권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한 젊은 [[해군]] [[장교]](와 육군 [[사관생도]])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총을 쏜 이는 구로이와 이사무). 당시 이누카이 쓰요시는 휴일이기에 관저에서 쉬고 있었고 아내는 외출중이었다. 총리 관저로 온 해군 군인들은 해군 소위 2명과 생도 3명인 5명이었는데 수상 관저의 정문과 후문으로 나눠 들어왔는데, 경비원이 이를 보고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것을 알고는 쓰요시한테 와서는 빨리 피신하라고 했다. 하지만 쓰요시는 거절하며 그들을 만나겠다고 했다. 결국 정문으로 들어온 장교가 먼저 총리를 발견하고 권총을 쐈지만 불발이었다. 식사 직전이었던 총리는 "기다려, 총은 언제든지 쏠 수 있네. 말로 하면 알아듣네!"라고 하면서 응접실로 이들을 안내했다. 하지만 후문으로 들어온 군인 4명이 응접실에서 총리를 발견하자마자 "문답무용, 발사!"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번엔 불행하게도 불발이 아니어서 이누카이 쓰요시는 총알 3발을 맞으면서 그대로 사망했다. 군인들은 그가 죽을것임을 알고는 내버려두고 떠났으며 하녀가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누카이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후 주모자 11명은 [[재판(법률)|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인 [[구명]] 운동과 35만 명의 서명으로 [[사면]]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는 살해 당일 일본을 방문한 '''[[찰리 채플린]]'''을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를 살해한 장교들은 찰리 채플린 역시 죽이려 했으나 찰리 채플린은 살아 남았다. 찰리 채플린은 이누카이 쓰요시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했다. [[5.15 사건]] 문서의 여담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